FOR PEACE & HUMAN DIGNITY
FOR PEACE & HUMAN DIGNITY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적 약자와 함께 싸우고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래하는 사람들.
" 함께하는 행복이 우리 힘이다 "
종합예술단 봄날은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존엄을 위해
노래하는 사람들 입니다.
인권과 노동권을 탄압받는 사람들,
산업재해와 사회적 참사 희생자들,
장애인과 각종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싸움을
응원하기 위해 거리에서 노래로 힘을 보태며,
한반도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해 노래합니다.
민중가요와 대중가요, 예술가곡뿐만 아니라
스스로 합창곡을 만들어 부르며,
2023년 강릉 세계합창대회에 출전하여 금상을 탔습니다.
2024년에는 독일개신교 베를린 선교부의 초청으로
화해의 교회와 삼위일체 교회, 베를린 장벽과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평화와 인권의 길 위에서'라는 주제로
6차례 공연을 펼쳤습니다.
"함께하는 행복이 우리 힘이다"가 봄날의 구호입니다.
‘독일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아리’ 재설치를 환영하며,
일본 정부는 평화의 소녀상 설치 방해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독일 베를린 미테구의 평화의 소녀상 ‘아리’가 지난 2025년 10월 17일 새벽, 미테구청에 의해 기습 철거된 지 3개월여 만에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리’는 기존 설치 장소였던 브레머 거리와 비르켄 거리(Bremer Straße / Birkenstraße) 교차로에서 도보 3분 거리에 위치한 ZK/U(예술 및 도시학 센터)의 허가로, 센터 앞에 향후 1년간 임시 설치된다. 제막식은 2026년 1월 22일(목) 저녁 7시 30분(현지시간)에 열릴 예정이다.
정의기억연대는 평화의 소녀상 ‘아리’가 다시 시민의 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번 재설치는 일본 정부의 지속적인 외교적 압력과 설치 방해에도 불구하고, 코리아협의회 등 독일 시민사회와 예술가, 인권활동가들,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세계 시민들의 연대와 지지가 함께 만들어낸 소중한 성과이다. 비록 ‘임시 설치’라는 한계를 안고 있지만, ‘아리’의 이번 귀환은 역사를 지우려는 정치적 억압이 거셀수록 기억하고 저항하며 지켜내려는 시민들의 힘과 연대가 더욱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평화의 소녀상을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면 역사 또한 지워질 것이라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명백한 오판이며, 이제는 버려야 할 망상이다. ‘아리’가 철거된 이후에도, 그 자리는 결코 비어 있지 않았다. 현지 주민들은 정기적으로 꽃과 편지로 ‘아리’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철거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지워지지 않는 역사와 책임에 대한 '아리' 외침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이어 나갔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성노예제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책임을 회피하며,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방해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역사 부정과 기억의 억압은 국제사회의 신뢰를 훼손할 뿐 아니라, 피해자들의 존엄을 또다시 침해하는 폭력임을 명심해야 한다.
정의기억연대는 베를린 미테구의 평화의 소녀상 ‘아리’의 영구설치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이 역사 정의를 지키고,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더욱 널리 확산시킬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다. 또한 전 세계에서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존엄과 기억을 지켜 나가는 시민들과 굳건히 연대해 나갈 것이다.
2026년 1월 21일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그 길이 불편하다
-조혜영 햇살(종합예술단 봄날 소프라노)
나를 불안하게 하는 길이 있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길은 저만치 멀어져간다
끝내 한 걸음도 딛지 못한 발바닥에
달라붙는 진흙 덩이가
내 한숨과 비겁의 흔적이라는 걸
깨닫기도 전에
길은 다시 저만치 멀어져간다
한 걸음만 함께 걸어요
그 보폭에 당신도 장단 맞춰주세요
깃발을 따라오세요
길 위에서 이어지는 발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올 즈음
하루의 긴 노동이 끝나고
나른해지는 저녁이 불편하다
집으로 향하는 퇴근길이 불편하다
그 길을 걸으며 손을 흔드는
훤히 아는 사람들의 손짓이
불편하다
급식 일지-급식 노동자
요령이 없으면 가당치 않은 일이지
힘으로만 할 수 없는 중노동이지
눈치가 없으면 버틸 수 없지
눈치를 터득하기엔 여유가 없지
노동의 가치를 생각한다는 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지
어떤 이는 하루 이틀 일하다 그만두고
어떤 이는 일주일 버티다 고참과 싸우고 그만두고
어떤 이는 모질게 3개월 버티다 사라지기도 하는
학교 급식실
번개같이 빠르고 파도처럼 드세다
머슴같이 일하며 중무장한 병사다
몸은 굴착기가 되고 기중기가 되었다가
자동 컨베이어 벨트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초등학교 아이들이 먹을
밥을 짓는다
하루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퇴근할 땐
여인의 표정을 지으며 화사한 화장을 한다
곱상한 사람으로 변신해
조신조신 깔깔깔 퇴근한다
[출처] 조혜영 시집, <그 길이 불편하다>| (https://blog.naver.com/prunsasang/223452536253)
어떤시인
-조혜영
그는 매일 일터에서 먹는 밥을
페이스북에 올린다
조식 중식 석식
조식과 석식을 먹는걸 보니 야근도 하고 새벽 출근도 하는 모양이다
중식만 올리지 못하는 그는 시인이다
시인이 시는 안올리고 고봉밥 식판을
작업일지처럼 푸짐하게 올린다
노동하는 노동자 시인이 시는 어디다 여며놓고
오늘도 밥 밥 고봉밥
그의 밥을 보면 고된 노동이
지게 볏단처럼 수북하다
햇살의 글
강신만, 걸어온 길
바람 ・ 2025. 12. 5. 10:44 사람사는교육,강신만
강신만, 제가 걸어온 교육 변혁의 길
1. 유년 시절
저는 1963년 음력 2월 20일,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백아산 아래 자리한 작은 마을 원리는 네 살 때 가족과 함께 광주로 이사하면서 기억 저편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다만 네 살이 되기 훨씬 전, 밭에서 일하던 엄마를 향해 달려가다 넘어졌던 순간이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저의 가장 또렷한 첫 기억은 네 살 무렵 광주에서입니다. 넓은 들판을 가르며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달려오는 기차를 아버지 품에 안겨 놀라 울었던 장면. 지금은 사라진 광주천변 태평극장에서 본 영화였습니다.
2. 초등학교 시절
1970년, 광주시 서동 대성국민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1학년 6월, 기성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심한 폭행을 당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은 저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이후 월산초등학교와 광천초등학교로 전학했습니다. 학교 대신 산과 들을 떠돌며 친구들과 놀기 일쑤였고, 급기야 어느 해 정월 대보름날에는 학교 책상과 의자를 불태운 사건으로 퇴학을 당하는 방황을 겪었습니다. 2년간의 공백 끝에 4학년에 복학했고, 5학년을 건너뛰고 6학년에 배치되어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3. 중학교 시절
1977년, 광주 무진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럭비부 주장으로 활동하며 운동을 좋아했지만, 코치의 폭행과 선후배 간의 매타작 문화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운동부를 떠났습니다.
4. 고등학교 시절
1980년 3월, 인성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해 5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전남대생이던 큰형과 총을 메고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둘째 형과 함께 겪은 5·18은 저의 삶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1981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당시 불법단체였던 흥사단 아카데미 써클에 가입하며 사회의식에 눈을 떴습니다.
5. 대학 시절과 학생운동
1983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태권도를 잘해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저는, 그해 5월 사범대 써클 ‘청량원’으로부터 5·18 항쟁 르포를 부탁받으며 저항 정신을 깨달았습니다. 태권도 도복을 벽장에 넣고 유학을 포기한 뒤, 본격적으로 전두환 정권에 맞선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청량원에 가입하고 흥사단 아카데미(‘아카’)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3학년 무렵, 도서관 5층 난간에서 '군부독재 타도!'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와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수배되었으나 체포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6. 사상 논쟁과 삶의 전환
1980년대 후반, 학생운동권 내부에서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이 격렬할 때, 친구 이재호가 김세진과 함께 분신으로 생을 마감하는 깊은 충격을 겪었습니다. 그 사건은 학생운동과 사상 논쟁을 단순한 이론이 아닌 삶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제가 걸어갈 길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7. 교사 시절 30년
1990년 3월 1일, 서울 석관중학교로 처음 발령을 받았습니다. 1989년 전교조 창립으로 1500여 명의 교사가 해직되는 엄혹한 시기였지만, 저는 곧바로 전교조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교사 30년의 세월, 저는 학교라는 뜰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작은 씨앗을 심고자 묵묵히 길을 걸었습니다. 불합리한 그림자(촌지, 권위주의)를 걷고 학생의 주체성을 틔우려 노력했으며, 그 희망으로 혁신학교 운동과 전교조 활동을 함께 일구며 더 공정한 교육 제도의 길과 교육정책 개발을 위해 노력 해 왔고 지금도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약력
1)현(現)
■서울교육희망포럼 대표 ■현)생태중심교육 시민사회계약운동본부 대표
■현)교사정치기본권찾기연대 상임대표 ■현)전국민주화운동동지회 서울 대표
■현)교사정치학교장 ■현)종합예술단 봄날 단원(베이스)
2)전(前)
■석관중, 창일중, 신창중. 신도봉중, 백운중, 수락중, 북서울중 근무
■서울시교육청 혁신미래교육추진위원장
■서울시교육청 학교개혁준비위원장
■국가교육회의 지역사회 특별위원
■제21대 대선 이재명 후보 선대위 교육혁신위원장
■전교조 교육희망신문 편집장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부위원장
■ 제20대 대선 이재명 후보 선대위 교육특보단 부단장
■서울시 노원구 교육혁신지구 운영위원
■서울시 도봉구 교육발전협의회 위원
■서울시 강북구 청소년거리축제준비 워원장
3)다녀온 학교
■광주 광천초등학교 졸업
■광주 무진중학교 졸업
■광주 인성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과 졸업
[출처] 강신만, 걸어온 길|작성자 바람
민주구국선언
이 민족은 또다시 독재정권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삼권분립은 허울만 남고 말았다. 국가안보라는 구실 아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되어 가고 언론의 자유와 학원의 자주성은 압살당하고 말았다. 국민은 복종을 원하지 않고 구체적인 참여를 주장한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3·1운동과 4·19에 쳐들었던 아시아의 횃불을 다시 쳐드는 일이다. 민주주의 만세!
윤석열 파면 선고문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반행위에 해당합니다.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인정됩니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땅의 평화
-문익환 시
위대한 인류의 위대한 문명의 그늘 아래서
배고파 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발바닥은 아프고 쓰립니다
활이 아닙니다
칼도 창도 아닙니다
기관총도 대포도 탱크도 아닙니다
핵무기도 전자무기도 아닙니다
평화가 문제입니다
하나도 평화 둘도 평화 셋도 평화입니다
은하 성운 밖으로 밀려나는 평화를 보며
슬퍼하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평화를 애타 바라는
하느님의 뜨거운 마음입니다
무대를 향해 고성의 야유가 쏟아진다. 이상화의 시에 변규백이 곡을 붙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노래가 끝난 뒤 남녀 단원 둘이 무대 앞쪽으로 나와 언쟁을 벌이고 있다. 함께 삼일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신우’와 ‘무개’는 일본의 지배가 더욱 공고해지고 폭압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친일 노선과 항일 노선을 둘러싸고 대립 중이다. 항일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무개의 그림자 뒤로 들판을 달리는 말발굽과 같은 피아노 전주가 울리면서 무대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에 둘러앉아 있던 합창단원들이 중앙으로 나와 노래를 시작한다.
바람을 지고 어둠을 이고 조국을 품고 끝도 없는 길
끝도 없는 길 빗줄기 뚫고 여기 달린다 나 여기 달린다
[……]
아무개라고 적어다오. 묘비 없는 죽음뿐이니
해방되는 그날까지 총을 들어라
원수놈들 잊지마라 죽은 동지 함께 올 테니
대한독립 깃발 아래 총을 들어라 총을 들어라
―〈아무개-항일 독립군의 노래〉 중
합창극 《아무개의 나라》의 주제가 격인 〈아무개-항일 독립군의 노래〉는 종합예술단 봄날이 합창극 기획을 시작한 2023년부터 창작에 들어갔던 노래다. 가사는 이건범 단원이 지었고, 젊은 음악가 강반디가 작곡했다. 노래가 끝난 순간 한 단원이 태극기를 펼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객석에서는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아무개가 꿈꾸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지켜가자는 합창극 《아무개의 나라》는 윤석열의 내란 계엄 사태 때문에 더더욱 시대적 의의가 커진 작품이다.
14곡의 합창곡과 6편의 낭독, 4장면의 연기가 어우러지며 외세의 침탈이 시작된 1865년부터 광복까지의 80년을 하나의 이야기로 끌어가는 합창극 《아무개의 나라》는 광복 80주년 기념 공연으로 기획되었다. 1945년 해방된 날로부터 80년이지만 절묘하게도 그 이전의 80년 역사가 광복의 감격과 의미를 돋보이게 한다. 봉오동전투의 주역인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 합창단원 손에 이끌려 아무 생각 없이 공연을 보러 왔던 반민특위기념사업회 이영국 사무총장은 공연에 감동한 나머지 합창단원으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반민특위 조사관이었던 이 총장은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음악교사로 살아온 이다. 그는 종합예술단 봄날에 들어온 최초의 성악 전공자다.
20명이니 규모만으로는 좀 수가 적다 싶은 합창단. 게다가 음악 전공자 한 사람 없이 프로들도 엄두를 내지 못할 ‘칸타타’를 기획하여 무대에 올린 종합예술단 봄날. 좀 이상한 시민들의 모임임에 분명하다. 급식 노동자, 일반 회사원, 시민단체 대표, 교육단체 간부, 작가, 출판편집자, 방과후 교사, 퇴임한 전교조 교사, 자영업자, 전 민주노총 간부 등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지만, 노래를 좋아하고 노래로 세상을 따듯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래하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종합예술단 봄날은 2021년 9월에 창단하였다. 어떤 합창단에서 주축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좀 더 폭넓고 인간적 정이 넘치는 합창단을 만들고자 알음알음 사람들을 모았다. 활동의 출발은 명동역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부당해고에 반대하는 투쟁 문화제였다. 채 10명도 되지 않고 성부별 숫자 균형도 맞지 않았지만 봄날은 용감하게 무대에 올랐다. 그들의 무대는 세종호텔 앞 도로에 붙은 인도 한켠이었으니, 여느 음악인들의 무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렇게 시작된 종합예술단 봄날의 노래 행진은 동국제강 산재 사망 이동우 노동자 추모제, 경기도 폐암 사망 학교 급식노동자 추모제, 태안화력 김용균 추모제, 건설노조 양회동 열사 추모제 등 3년 만에 100여 회의 연대 공연으로 이어진다. 다들 자기 일이 있고 수도권에 흩어져 사는 처지인지라 연대 공연에 모든 단원이 다 모이기는 어렵다. 아주 적을 때는 대여섯 명이, 심지어는 세 명이 연대 공연을 한 적도 있다. 노래를 잘하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응원하고 아픔을 나누는 마음이 우선이다.
그렇다고 종합예술단 봄날이 그저 목소리와 구호만 앞세우는 선동대는 아니다. 2023년 7월 강릉에서는 세계합창대회가 열렸다. 인터쿨투르(INTERKULTUR)라는 독일의 예술공공단체가 2000년부터 2년에 한 번씩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돌면서 개최하는 합창대회로, 2023년에는 코로나로 1년 연기된 대회였다. ‘케이 보이스 싱 투게더’라는 예선 격의 국내 대회를 거쳐 세계대회에 나온 합창단들이 있었고, 세계 곳곳에서 수백 개의 합창단이 강릉을 찾아왔다. 여러 합창단이 주목을 받았지만 단연 특별한 존재는 종합예술단 봄날이었다. 진보적 노래 문화와 사회 참여를 추구하는 합창단이 흔히 주류 문화라고 치부되는 합창대회에 나온 것도 이색적이었지만, 이들이 들고 나온 진보적인 노래로 결국은 혼성 시니어 부문에서 금상을 받은 것.
종합예술단 봄날의 금상 수상은 단지 그 부문의 참가 합창단 중에서 잘했다는 뜻이 아니다. 1명의 국내 심사위원과 4명의 해외 심사위원으로 꾸려진 심사위원단이 매긴 절대 점수가 20점을 넘어야만 금상 후보가 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있었던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봄날의 노래가 세계 무대에서 통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봄날은 네 곡의 노래를 불렀다. 2010년 광양의 한 제철소에서 일하다 용광로에 빠져 죽은 청년 노동자를 추모하는 〈그 쇳물 쓰지 마라〉(제페토 작사, 하림 작곡)와 거리에서 싸우는 부당 해직 교사의 활동을 응원하다가 만들게 된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이건범 작사, 강반디 작곡),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함께하는 행복을 힘으로 느끼며 봄날을 맞자는 〈봄날이 온다〉(이건범 작사, 전다빈 작곡), 그리고 1970년대부터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자주 불린 교회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 등이다. 이 가운데 〈봄날이 온다〉는 봄날의 주제가와 같은 창작곡이다.
노래 실력도 실력이지만 진보적인 노래 문화를 일구기 위해 창작에 노력하는 면모가 일반적인 시민합창단은 물론이요, 프로합창단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2024년 독일의 기독교 베를린 선교부와 튀빙겐대학 한국학과의 초청으로 독일에서 세 차례 공연을 펼친 봄날은 ‘평화와 인권의 길 위에서’라는 공연 제목에 어울리게 〈착한 전쟁은 없다〉라는 평화 호소 노래를 창작하였고, 이 노래를 베를린 장벽 앞에서 불렀다. 벌써 이렇게 창작한 노래가 〈봄날이 온다〉와 산업 재해를 추방하기 위해 만든 〈목숨은 지켜야 한다〉, 〈어디까지 내주어야 한단 말이냐〉, 부당해고 노동자들의 감동적인 싸움을 그린 〈작은 저항〉 등 6곡이다.
종합예술단 봄날의 음악 분야는 진보적인 노래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민중가요만이 아니라 들국화의 〈행진〉, 변진섭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 등 유명한 대중가요와 〈내 나이가 어때서〉, 〈무조건〉 같은 트로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내 영혼 바람 되어〉와 같은 클래식까지, 그리고 창작곡까지 말 그대로 종합적이다.
노래 분야만이 아니라 공연에서도 합창에다 낭독과 연기, 춤까지 종합적인 예술단으로서 과감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칸타타 《아무개의 나라》는 그런 점에서 봄날에게도 매우 뜻깊은 공연이다. 특히나 이 공연은 대체로 1회 공연하면 사라지는 여느 합창단들의 공연과 달리 2025년만 해도 6차례 공연이 펼쳐지고, 해마다 삼일절이나 광복절 즈음에 고정으로 무대에 올려질 예정이다. 2025년 8월 9일에도 광복절을 앞두고 흑석역 소태산홀 공연이 잡혀 있다. 시민합창단에서 일종의 장기 공연을 만들어낸 이례적인 경우다.
사람들의 염원을 구체적으로 모아내는 일에도 봄날은 게으르지 않다. 실질적으로 세상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돈을 모으고 뜻을 모은다. 1년에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노동자가 2천 명이 넘는 현실에서 생명안전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운동에 힘을 보태고자 2023년 가을에 기금 모금 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에서 모은 수익금 500만 원을 생명안전시민넷에, 100만 원을 김용균재단에 기부하였다. 2024년 7월 독일 공연 전에는 베를린 미테구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이 철거될 위기라는 소식을 듣고 주변에서 투쟁 기금 580여만 원을 모아 독일 코리아협의회에 전달하였다. 물론 응원의 노래가 빠지지 않았다.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그리고 철거를 기도하던 미테구청 앞에서 철거 반대 공연을 펼친 것이다.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에도 단원들이 100만 원을 모아서 냈다.
사실, 종합예술단 봄날은 자기 살림도 빠듯한 편이다. 그럼에도 시민합창단 수준에서는 흔치 않게 지휘자와 반주자 수당을 높게 지급하고, 2025년부터는 이들의 퇴직금을 적립하기 시작하였다. 예술노동자인 지휘자와 반주자를 ‘착취’해서는 자기 정체성이 무너진다는 생각에서다. 단원들이 거두는 회비로 이 재원을 모두 마련할 수는 없으니, 후원 단원을 모으고 있다. 정식 공연을 할 때면 자리의 좋고 나쁨이 없음에도 기본권 외에 가격이 더 높은 응원권과 후원권을 팔아 재원을 확보한다. 공연을 하고 나면 저작권료를 따박따박 정산하여 저작권협회에 낸다. 문화예술 생태계를 조금이라도 보호하고 키워가려는 마음에서다.
세종호텔 앞 공연 이야기도 했지만, 봄날의 무대는 장비와 주위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다. 바로 옆으로 버스가 지나가고, 사람들은 노래가 들리든 말든 바쁘게 걸어가고, 전원이 없어 마이크를 설치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춥든 덥든 실내가 아니라 주로 바깥에서 공연하니 추위에 발 동동 구르면서 기다렸다가 언 목소리로 노래하고 한여름 더위엔 뜨거운 숨결로 노래한다. 비가 폭포수처럼 퍼부을 때도 비옷을 입고, 아니면 처마 밑에서 봄날은 노래한다. 함께 살아가는 존엄한 인간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례하고 독선적인 판단에 인생의 낭떠러지로 몰리는 모양을 그냥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023년 강릉 세계합창대회에서도 불렀던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의 가사에는 이런 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토바이 버스 빵빵 사나운 길바닥 한 켠에 줄지어서
힘 내세요 응원의 노래 부르네 등 뒤에 바쁜 발걸음
무대 없는 여기서 예술은 무슨 예술
그대 없는 거기서 진실은 무슨 진실
시들지 않는 시들지 않는 당신이
당신이 예술입니다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 중
“봄날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거리에서 노래하는 그들을 ‘현대의 독립운동가’로 느꼈습니다. 그 진정성과 뜨거운 연대의 힘이 제 마음을 움직였지요.”
지휘자 심형진의 소감이다.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과 형식미를 추구하는 순수 예술인이었던 바리톤 심형진에게 음악은 오롯이 ‘음악을 위한 음악’이어야 했다. 호흡과 화음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콘서트홀이 중요했다. 그는 이제 동지다.
“어느새 거리, 묘지, 농성장, 공장, 빈소, 투쟁 현장에서 이들과 함께 노래하고 지휘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지요. 처음엔 낯설고도 충격적이었지만, 점차 이 활동을 통해 음악이 가진 위로와 연대의 힘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순수음악과 실천적 음악 활동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고 느껴요. 봄날의 음악은 목적을 갖고 있지만, 그 의도가 순수하기에 오히려 더욱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울림 안에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죠.”
지휘자 심형진은 클래식 음악을 기획하고 연주하는 정통 음악인이지만 봄날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여러 세상과 만난다. “함께하는 행복이 우리 힘이다”라는 봄날의 구호처럼, 그는 이 활동을 통해 진정한 공동체의 힘과 기쁨을 체험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합창의 시대다. 노래를 특출나게 잘 부르지 못해도 여러 목소리가 모이고 섞여 하나의 행복하고 환상적인 소리를 내는 합창은 세상을 살아가는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활동이다. 종합예술단 봄날이 그 행복한 시대의 선두에 서 있다.
국회토론회 현장증언문(공연예술분야) -공연예술인 성악가 심형진(예지사 공동대표, 예술인연대 사무총장)
국회토론회 현장증언문(공연예술분야)
공연예술인 성악가 심형진
(예지사 공동대표, 예술인연대 사무총장)
1. 안녕하십니까.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성악가와 지휘자로 활동 중인 공연예술인 심형진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실연자이자 공연예술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화려한 무대 뒤에 가려진
공연예술가들의 위태로운 현실과 산재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인 예술인들의 삶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2. 공연예술인이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는 관객에게 감동을 주지만, 그 무대는 정작 예술인에게 추락, 충돌, 붕괴의 위험이 일상적으로 노출된 불안전한 일터입니다.
3. 최근 몇 년간 우리는 동료들의 비극적인 소식을 연이어 접해야 했습니다. 2023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오페라 리허설 도중 400kg의 하강하는 무대 장치와 충돌하는 중상을 입고 투병하다 끝내 세상을 떠난 성악가 고(故) 안영재 님, 2018년 김천시 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오페라 작업 도중 무대 리프트에서 추락한 고(故) 박송희 님, 그리고 2025년 세종시 예술의전당 무대 리허설 중 오케스트라 피트로 추락하여 중상을 입고, 아직 까지 병원치료와 수술이 진행중인 무용수들까지, 이 모든 참사는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구조적 방치와 제도의 부재가 만든 대한민국 예술계의 비극입니다.
4. 하지만 사고 이후 마주하는 현실은 더욱 참담합니다. 대다수 공연예술가는 프로젝트 단위의 초단기 계약이나 외주에 외주를 거듭하는 복잡한 계약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고가 발생해도 예술회관, 공연장이나 합창단, 예술단, 제작사는 '위험의 외주화'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합니다. 심지어 공공기관인 서울시와 세종문화회관은 사과는 커녕 사망한 예술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몰상식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5.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무대, 공연 사고 시 예술가들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행정 당국과 근로복지공단은 예술인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예술인 복지법」을 근거로 역설적이게도 예술인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단하며, 억대의 병원비와 사고 수습의 책임을 예술가 개인이 홀로 감당하게 만듭니다.
6. 현재의 예술인 산재보험은 실효성이 없습니다. 예술인이 보험료 전액을 부담해야 하는 '임의가입' 방식이자, 지위 또한 근로자가 아닌 '자영업자'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연장들이 '제작'이 아닌 '대관'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안전관리의 주체와 책임이 분산되어 현장 안전 점검과 교육이 형식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7. 우리는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동료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예술가의 창작, 실연 등 공연 활동은 일이며, 노동입니다. 예술인도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며, 노동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1. 예술인 산재보험의 의무화와 당연적용을 통해 사각지대를 해소해 주십시오.
2. 예술인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잘못된 법 해석을 바로잡고 실질적 노동자성을 인정해 주십시오.
3. 공공 공연장을 단순 임대, 대관 공간으로 운영하는 체제(일회성 공연)에서 '제작극장' 체제(지속적 생산)로 전환하여, 상시적인 안전관리 체계와 안정적 고용 환경을 구축하여 주십시오.
4. 사고 발생 시 책임자들이 책임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사용자 책임을 명확히 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해 주십시오.
예술인의 생명과 안전이 결코 '비용'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예술가들이 안심하고 무대 위에서 예술의 빛을 밝힐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산재보험과 안전한 창작 환경을 만들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1월 16일
공연예술노동자 성악가 심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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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노동은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는 ‘거룩하고 귀한’ 행위이다.
*노동자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고
그 정당한 몫을 당당히 요구할 권리가 있는
존엄한 인격체를 뜻한다.
*예술노동자
예술가는 사회를 지탱하고 예술과 문화를 창조하는
생산의 주역이다.
<'광화문' 한글 현판도 함께 … '우리의 얼굴' 되찾는다> -이건범 / 한글문화연대 대표
<'광화문' 한글 현판도 함께 … '우리의 얼굴' 되찾는다>
시민언론 민들레. 2026년 1월 20일
이건범 / 한글문화연대 대표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함께 달게 되었다. 1월 20일 국무회의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국어단체와 국민들의 뜻을 건의하였고 이를 이재명 대통령이 받아들였다. 국가유산청장도 과거의 현판 불량과 같은 문제가 없도록 잘 만들겠노라 약속했다. 뜨겁게 환영한다. 지금의 광화문 현판은 대한민국 얼굴로서는 부족하다. 이제 마땅히 지녀야 할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한글이 나라글자가 된 지는 벌써 130년이 되었지만, 그 과정은 매우 굴곡이 심했다. 동학농민전쟁의 충격으로 갑오개혁이 발표되었고, 이때 우리의 나라글자가 공식적으로 ‘한글’이라고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렇지만 <독립신문>과 같은 한글전용이 자리 잡지 못한 채 일본식 국한문혼용이 100년 넘게 한국의 문자 생활을 지배했고, 1990년대 말에 와서야 한글 전용이 자리를 잡았다.
한글과 한자의 줄다리기는 우리 현대사의 궤적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역사적 변화와 방향을 함께하게 되었다. 우리는 민주주의 시대로 왔고 한글의 시대로 왔다. 이제 한자는 전공 지식과 학술 용어, 한문과 서예 등의 예술 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표기는 한글 전용으로 확실하게 바뀐 것이다.
한글 전용으로 우리의 표기 생활이 바뀐 것이 경복궁이나 숭례문과 같은 국가유산의 현판 글자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국가유산은 원형 복원과 원형 관리가 원칙이다. 그렇지만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다는 일은 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원형 복원이 불가능한 사정도 있지만, 그보다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발전을 현판에 담아 국가 상징으로 만드는 작업인 것이다.
첫째, 국제적 오해를 없애야 한다. 우리가 오랫동안 한자를 썼고 궁궐 등 여러 국가유산이 한자로 적혀 있지만, ‘광화문’이라는 대한민국 얼굴마저 한자만으로 적혀 있어 우리 정체성을 외국에 알리는 데에 지장을 주어선 안 된다. 130년 동안 형성된 문자 측면의 새로운 민족 정체성을 우리의 얼굴에 해당하는 광화문에는 함축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자주적 문화를 가진 독립국가였고, 그 대표 상징이 바로 한글이다.
둘째, 새로 쌓이는 역사를 담아내야 한다. 광화문은 그저 볼거리 역사로서의 역사 유적이 아니라 현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민주 성지의 역사를 쌓아가고 있는 공간의 주요 구성물이다.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민주공화국의 이념적 좌표가 애민 정신의 산물인 한글로 광화문에 표현되는 것이 우리의 현대사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역사적 준비인 것이다.
누구의 글씨로 할 것이냐는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다. 국어단체들에서는 1446년 발간한 한글 창제 설명서 <훈민정음>에서 해당 글자를 뽑아 새로운 국가 상징물을 만들자고 제안해 왔다. 더구나 올해는 1446년 한글 반포 580돌이자, 1926년 ‘가갸날’이라고 처음 한글날을 기리기 시작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니, 더욱 뜻깊은 일이다.
2020년에 한글문화연대에서 리얼미터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우리 국민 가운데 한글 현판만 달자고 한 국민은 40.6%, 앞뒤로 한글과 한자 현판을 달자는 의견이 20.2%, 지금처럼 한자 현판만 달자는 의견은 29.7%였다. 독립문처럼 앞뒤로 한글 현판과 한자 현판을 달 수도 있고, 중국의 자금성 천안문처럼 글자체가 다른 두 개의 현판을 함께 달 수도 있다. 국무회의에서는 한자 현판과 한글 현판을 위아래로 함께 다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했지만, 방법은 열어놓고 토의해 가자. 그보다는 한글 현판을 거는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더 생각하자. 더 좋은 민주공화국을 향한 우리 국민의 꿈을 담아내고 세계에 알리자.
끝.
동북아 평화 위협하는 극우파 총리의 야망
일제의 살육의 역사와 제도화된 잔혹성
불안한 땅에 사는 나라의 대외 팽창 야욕
들어가며
2026년 2월 8일. 일본의 집권 자민당이 창당 이래 최다 의석을 차지했다. 일본은 이제 ‘전쟁할 수 있는 나라’의 염원을 이룰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310석이 개헌안 발의선인데, 자민당은 316석을 얻었다. 여기에 연정대상인 일본유신회의 36석을 합하면 여권은 352석이 된다. 전체의석의 3/4 이상(75,7%)을 차지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처음으로 일본 우익은 꿈을 이루었다. 이로써 우리 대한민국과 북한, 중국과 대만의 미래가 매우 불안해졌다. 불길하다. 재무장한 일본은 2차대전 때의 그 지상 최악의 악마로 다시 돌아올까. 지난 80년 동안, 세상은 크게 달라졌다. 우리도 부강한 나라가 되었고, 중국은 G2의 한쪽이 되었다. 핵무기도 가지고 있다. 북한도 만만치 않다. 일본은 가장 먼저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다. 동시에 미국과 중국처럼, 일본도 5대양 6대주의 그 어디든, 자국에 이익이 된다면, 서서히 하나씩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들 것이다. 초반에는 경제력으로 지배하고, 저항하면 군사력으로 제압할 것이다.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일본 총리(1961~ )는 실은 취임(2025년 10월 21일) 직후부터, 특히 동북아평화를 위협하는 발언을 지속적으로 발설해왔다. 일본 최초의 여성총리(104대)라는 역사성과 故 아베 전 총리 뺨치는 강성 보수성향의 정치인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가 ‘야심적으로’ 주장하는 이슈는 세 가지다. 1)비핵 3원칙--보유하지 않는다. 만들지 않는다. 들여오지 않는다—을 재검토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핵공격 피폭국이다. 헌법에 “전쟁을 벌이지도 않고 무장도 하지 않는다”, 는 조항을 둔 것은 그 때문이다. 2)중국이 대만을 점거할 경우, 일본은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중국은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하고, 외교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꺼내면서 초강경 태도를 취하고 있다. 3)우리의 독도 영유권 문제다.
이 여성은 총리가 되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독도-일본에서는 竹島(죽도. 다케시마)라고 함-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취임 직전에는, “‘다케시마의 날’ 행사(2월 22일)에 장관급이 참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지난 2022년에는 어느 극우단체 심포지엄에 초대되어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관하여 우리가 어정쩡하게 하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이 기어오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욕적인 도발이다. 2002년,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8월 13일에 참배한 것에 대해서 “종전일인 8월 15일에 참배하라”고 비판한 일도 있다. 바로 그 여인이 지난 1월 13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최상으로 환대했다. 평범한 사람들도 ‘과공비례’(過恭非禮)의 고사를 떠올렸다.
8일 오후 일본 도쿄 자민당 개표센터에서 당선확정자에게 꽃을 달아 주고 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2026. 02. 08 [AFP=연합뉴스]
다카이치 총리를 앞세운 일본 우익의 저의와 그 흉포한 과거사를 미국도 알고, 중국도 알고 있다. 당연히 우리도 알고 있다. 전쟁은 심지어 사소한 감정다툼으로 시작하기도 하고, 불의한 정치인들과 나쁜 정치가 섞여서 일방이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공격함으로써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기도 한다. 역사의 교훈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과연 격동하는 한-중, 한-미, 한-일 관계에서 크고 깊은 지혜를 발휘하여 대한민국과 동북아를 굳건한 평화의 땅으로 너끈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슬픈 열도
일본은 태평양 ‘불의 고리’ 위에 놓인 불안정한 땅이다. 이 열도의 대표적인 특징은 지진과 화산, 태풍과 해일 등 천연재해다. 일본은 3000만년 전, 이른바 ‘태고시대’(太古時代)의 지각변동 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대략 10만 년 전쯤에, 열도가 오늘의 지도와 비슷한 모양(지형)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6500만년 전(신생대 4기)에 형성되었으며, 200만년 전쯤 오늘의 일본열도와 비슷한 꼴을 이루었다는 주장도 있다. 둘 다 전문가들의 연구내용이다. 그 숫자의 차이를 따지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 후 변함없이, 규모를 가늠할 수도 없고, 횟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하고 빈번한 화산활동이 기나긴 세월 동안 이어졌다. 지금도 1년에 크고 작은 자연재해가 1천 회 넘게 발생하고 있다.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하루에 3회 정도의 지진이 발생하는 셈이다. 나는 이 점이 일본과 일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고려사항이라고 생각한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같은 초고강도 지진(강도 9 이상)과 해일은 100년~200년 안에 한 번씩 일어나는 경향이라는 연구자료가 있다. 물론 규칙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 사이에, 여러 차례 일어날 수도 있고,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중대형급은 한 사람의 생애 동안 두세 번 겪을 수 있다고 한다.
멀쩡하던 땅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고, 갈라질 수도 있고, 그 틈에서 종말론적 불기둥이 솟아오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태내에 있을 때부터 느끼기 시작하며, 죽는 날까지 그 공포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은 불행하다. 그 감각은 그들의 무의식 속에 깊숙이 잠재한다. 일본인들은 참으로 특별한 족속이다. 그에 관하여 누구든 측은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특별한 자연환경이 일본족의 정체성을 결정한 핵심요소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사람들마다 개인차가 있고, 예외도 있으며, 지역별로 재해의 종류와 강도와 빈도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100년 동안, 자연재해로부터 자유로운 지역(현 단위)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상전벽해’
이 말은 원래 도교(道敎)에서 나온 격언이라고 한다. 긴 세월이 흐르면, 뽕나무밭(桑田, 상전)이 푸른 바다(碧海.,벽해)가 되고,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바다가 다시 뽕밭이 된다는 신선의 말이었다. 현대인의 수명이 100년 안쪽이니, 이 시대의 남녀노소는 그 불노장생(不老長生)의 초인들에게나 가능한 초월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질학(地質學. geology)에서 언급되는 숫자들은 좀 크다. 구약성서의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조차 지금으로부터 불과 3000년 전의 기록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는 문학 또는 일종의 신학에서 쓰일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자체로 왜소한 인간의 기준으로는 잴 수 없는 무한수(無限數)이기도 하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이다. 제방을 넘어 들이닥친 해수가 강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하더니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넓은 들판이 삽시간에 바다가 되었다. 2차대전 때 원자탄을 맞은 일본! 그 폐허 위에 이룩한 빛나는 현대사와 그 화려한 문명! 그 위대한 성취가 천연재해 앞에서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무너졌다.
코발트빛 푸른 바다, 아득한 수평선을 넘는 황홀한 석양, 그 압도적인 풍광을 특권적으로 누리던 언덕들은 사라지고 그곳에 우럭(rock-fish)이 떼 지어 다니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충격적인 피해는, 아직 도망치지 못한 어린이들과 노약자들과 그들을 챙기려고 애쓰던 청장년 계층 대부분의 죽음을 포함한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듯, 멈추지 않고 달려드는 해일과 지진은 마치 오래 굶은 표범이 토끼를 쫓는 기세였다. 분명코 인간계의 종말을 목표로 삼은 형국이었다. 쓰나미에 맞아서 망자가 된 2만 명의 이웃들은, 가두리 양식장의 어류가 집단폐사하여 물에 떠 있는 것과 같았다. 실로 참혹한 꼴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수소폭발이 일어났다. 재앙으로 인하여, 지도에서 사라진 도시와 마을이 여러 곳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현장은 공허 그 자체다. 이는 현실이면서 동시에 비현실적이다. 기괴한 일이었다.
굴지의 강병부국 일본이 그 진재(震災)지역들을 재생하려고 10년 넘도록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사람들은 누구도 죽지 않은 것을 행운으로 여기지 않았다. 가족도 잃고 고향도 잃었으니 그야말로 모두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들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표현능력을 잃었다. 몸과 마음은 활성을 잃었다. 숨이 끊어진 시간부터 죽음으로 계산하는 것은 기계적이다. 그들은 그 상태로 생면부지의 낯선 땅으로 ‘추방되어’ 넋을 잃은 채 우왕좌왕하다가 생을 마칠 것이다. 이 초현실적인 재난의 목격자들은 66년 전(2011년 3월 재앙일로부터 1945년 8월 패전일을 계산한 것), “하늘에서 지옥이 떨어졌다”고 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그 멸절적 참상을 떠올렸다.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일본 후쿠시마 원전 모습. 2011년 3월 25일. AP 연합뉴스
이 광경은 계몽주의 재난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었다. 불과 10여년 전, 인류사회 전체가 생생하게 목격하며 다 함께 종말론적 상상을 하도록 만들었다. 재발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로 인하여, 일본사람들은 예외 없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앓는 집단이 되었다. 후쿠시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의 주민들이라 해서 덜하지 않다. 실로 안쓰러운 일이지만, 일본사람들과 일본열도의 숙명이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실은 이는 인류사회 전체의 숙명이고 아픔이다. 열도가 형성되고,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 지속된 현상으로, 언제든, 누구에게든, 어느 지역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일본이 2차대전 패망의 결과, 그 폐허 위에 이룩한 문명은 어느 모로 보나, 사뭇 기적적이다. 한편으로는, 두 가지 점에서 위태롭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하나는 아무리 높은 탑을 튼튼하게 쌓아올린다 하더라도, 동일본 진재(東日本 震災)의 비극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열도인들의 그 심리가 타자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공격성으로 나타날 가능성이다.
공포와 공격의 함수관계
작은 일에도 두려워서 벌벌 떠는 소심한 겁쟁이들이 뭉치면, 억눌려 지내던 시간 동안, 높은 퇴적층처럼 쌓인 억압은 언제든지 타자에 대한 공격성으로 돌변할 수 있다. 두려움과 불안이 집단화되면, 외부에 대한 공격성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공인된 이론이다. 그 집단 안에서는, 개인의 자아와 책임감은 약화된다. 평소에는 결코 하지 못할 행동을 저지른다. 전쟁 중에 적지(敵地)를 점령한 부대원들이 폭력집단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흔한 것은 이와 관련이 깊다. 아군의 피해를 과장한 정보가 집단에 공유되면 그 메시지를 명분 삼아 야만성이 점차 고조된다. 메시지에 독한 ‘양념’을 집어넣으면 만행은 최악이 된다.
신적인 권위의 천황을 받드는 병력은 그 어떤 악행도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쉽고 편하게 합리화한다. 제국은 그 만행들을 표창한다. 이 언어도단의 전도현상(顚倒現狀) 앞에서, 정상적인 심리상태와 올바른 판단력을 유지하거나 발언할 수 있는 사람들은 희소하다. 그들의 제안은 채택되지 않고 도리어 보복을 당한다. 죽거나, 정신병자가 된다. 양심의 편에 서는 것은 그런 일이다.
심리학이론 중에 공포-공격 가설(Fear-Aggression Hypothesis)이 있다. 자연재해나 사회적 불안이 길게 지속되고 오래 누적되면, 집단의 상층부는 이를 외부를 공격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 휘하 조직은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성을 야만적으로 발휘하며 역사에 피묻은 족적을 남긴다. 일본은 기나긴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그 당사자였다.
500년 전, 이순신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싸움은 건너뛰겠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1876년)부터 1945년 항복할 때까지, 일제가 조선과 중국, 그 민초들에게 자행한 만행들만으로 국한하더라도, 일제는 150년 동안, 필설로는 형언키 어려운 잔혹함을 실행했다. 그렇게 천인공로할,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질렀던 당사자는 아직도 당당하다. 큰소리친다. 오늘의 일본 우익은 그 ‘잔인 유전자’와 언제든 무기산업과 무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굴지의 산업경제력을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이종자, ‘대륙낭인’
나는 몇 년 전, 한상일 교수의 ‘일제의 대륙팽창과 대륙낭인’이라는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으면서도, 속으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대륙낭인’(大陸浪人)이라는 특이한 젊은이들이 비공식 신분으로 만주와 시베리아, 조선과 중국을 종횡무진하며 활약했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도 종종 거명되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1874~1937)다. 이 사람은 불과 20대 초반 나이에 대륙낭인이 되었다.
그는 서른 살도 되기 전에, 1901년 도쿄에서 흑룡회(黑龍會)라는 대륙낭인 모임을 창설했다. 황제나 다름없던 이토 히로부미와 거래도 하고, 그를 너무 온건하다, 며 공개비판을 하기도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파견으로 일본 수뇌부가 격노하여 고종을 압박할 때, 우치다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며, 강경론을 주도했다. 조선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동학군들을 만나 협상도 하고,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쳤다. ‘러시아 망국론’은 그의 저작이다. 중국쪽으로는 일찍이 쑨원(孫文)과 절친이 되어 신해혁명(1911년) 때도 도움을 주었으며, 손문이 죽을 때(1925년)까지 혈맹으로 지냈다. 이때는 ‘지나관’(中國觀)을 집필했다.
일본에서는 그를 학자로 분류한다. ‘대륙낭인’으로 활동한 일본의 극우 우국지사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비용을 받지 않았다. 이권에 개입하여 사업도 하고, 거기서 번 돈으로,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으면서 일본에 도움이 되는 일을 알아서 하면서 뛰어다녔다. 21세기 일본 우익 강경파들은 100년 전, 그 ‘대륙낭인’의 정신을 착실하게 잇고 있는 후손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대륙낭인들은 개인의 정치경제적 성공과 일본의 대륙지배가 목적이었고, 우리 독립군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 나라를 되찾는 것이 목표였다.
초토화작전과 삼광작전
간도참변
일제가 공식적으로 ‘초토화작전’(焦土化作戰),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는 표현을 문서에 남긴 것은 중일전쟁(1937년) 이후라고 하지만, 훈춘사건(일제가 현지 마적패와 짜고 자국 영사관을 공격하여 10여 명의 자국 요원들을 살해하고, 우리 독립군들이 공격한 것으로 조작한 사건) 이후, 간도에서 자행한 무차별적 살육과 그 잔혹함의 내용은 전형적으로 삼광작전(三光作戰)에 의한 초토화였다.
일제는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6개월 넘도록 북간도 전역의 한인촌 초토화작전(焦討化作戰)을 펼쳐 무자비한 살육을 저질렀다. 이 기간 동안, 3만 명 이상의 우리 동포들이 살해되었으며, 요인들 150명을 검거되었다. 가옥 3,500채, 학교 60여 개소, 교회 20여 개소, 양곡 6만 석을 소각했다. 현지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서방언론에 제보하여 이 지옥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백암 박은식 선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겨놓았다.
“아아! 세계민족 중에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수없이 많지만, 어찌 우리 겨레처럼 남녀노유(男女老幼)가 참혹하게 도살당한 자 있을 것이오. 역대 전쟁사에서 군사를 놓아 살육 약탈한 자 수없이 많지만, 저 왜적처럼 흉잔포학(凶殘暴虐)한 자는 들은 적이 없다.
저 왜적이 우리 서·북간도의 양민 동포를 학살한 일 같은 것이야 어찌 역사상에 일찍이 있었던 일이겠는가. 각처 촌락의 인가·교회·학교 및 양곡 수만 석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유를 총으로 죽이고 칼로 죽이고, 생매장하고 불에 태우고 결박하여 죽이고, 주먹으로 때려죽이고 발로 차서 죽이고 찢어 죽이고, 불에 태우고 가마에 삶고, 해부하고 코를 꿰고 옆구리를 뚫고 배를 가르고, 머리를 베고 눈을 파내고 가죽을 벗기고, 허리를 베고 사지를 못 박고 수족을 잘라서, 인류로서는 차마 볼 수 없는 일을 저들은 오락으로 삼아 하였다.
조손(祖孫)이 함께 죽고, 혹은 부자가 함께 참륙(斬戮) 당하고, 혹은 남편을 죽여 아내에게 보이고, 형을 베어 아우에게 보이며, 혹은 상인(喪人)으로 혼백(魂魄) 고리를 가지고 난을 피하다가 형제가 함께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산모가 기저귀에 싼 어린애를 품고 화를 피하다가 모자가 같이 명을 끊었다. 그밖에 허다한 일을 종이에 다 적을 수 없으며, 우리와 화양(華洋) 각처의 조사보고도 그 참상을 다 말할 수 없었다.”
이를 간도참변이라고 부른다(*華洋:중국과 서양. 동서양이라는 뜻).
삼광작전은 살광(모조리 죽인다, 殺光), 소광(모조리 태운다, 燒光), 창광(모조리 강탈한다, 搶光)의 단계를 거쳐 초토화한다는 일제의 전쟁기술이었다. 서양학자들은 이를 학술용어로 ‘Scorched Earth Policy’라고 쓰고 있다.
관동대지진
관동대지진(1923년)은 공포가 공격성으로 돌변한 대표적인 사례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는 순식간에 살육의 명분이 되었고, 군과 자경단은 조선인 5천 명을 색출해 죽였다. 당시 일본 유학생이던 함석헌은 이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함석헌은 이를 우발적 현상이 아니라, 일본사회에 깊고 짙게 뿌리내려 있는 국가주의와 집단적 불안이 결합하여 제노사이드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했다.
이와 같은 ‘집단적 불안의식’은 일본열도에 내재되어 있는 자연환경의 특성과 유관하다. 그는 훗날 자연의 붕괴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마음”이었다고 갈파했다. 연약한 인간들이 거대한 공포 앞에서 연대하지 않고, 증오와 살육으로 돌진했다. 관동진재는 일본 사람들에게 잠재된 공포심이 위기상황에서 어떻게 집단적 잔혹성으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원형적 사건이었다.
난징대학살
일제는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난징(중국 남경)의 민간인과 비무장 병사들 합하여 30만 명을 죽였다. 2만 건이 넘는 강간을 저질렀다. 피해자들 안에는 어린이와 노인이 포함되었다. 도시 안의 가옥들 대부분과 상점들은 약탈당했고, 불태워졌다. 간도참변의 규모에 비하여 10배다. 잔혹함의 내용은 동일하다. “지옥 같은 폐허”로 기록되었다.
대만 이민자 부부의 딸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아이리스 장(1968~2004)은 1984년에 난징사건에 관한 사진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잔혹한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난징의 강간’을 썼다. 1997년 출간 후, 일본의 우익세력과 극우민족주의자들로부터 지속적인 협박과 위협을 받았다. 일부는 ‘난징대학살’ 자체를 부정하며 그를 공격했고, 살해위협과 모욕적인 편지를 했다. 그는 끝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진실을 밝힌 대가였다.
위에 서술한 살육의 역사는 극히 일제가 저지른 만행들의 극히 일부다. 일제의 만행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비하여 단 한 가지 점에서 다르다. 나치는 인간을 숫자로 환원해 제거했다. 살육을 산업화했다. 일제의 폭력은 달랐다. 일본군은 피해자를 끝까지 인간으로 남겨둔 채, 그 인간성을 파괴했다. 참수, 고문, 강간, 생체실험 등은 단순한 군사행위가 아니라 제도화된 잔혹성이었다. 이는 살해가 아니라, 인간을 부수는 일이었다. 존재를 붕괴시키는 악마의 파괴공학이었다.
나는 일본열도의 자연재해가 일본인의 잔혹성을 결정지었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끝없이 반복되는 공포가 사회 전반에 축적되었고, 그것이 군국주의와 결합했을 때 외부를 향한 무제한적 공격성으로 분출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 폭력은 생존의 논리가 아니라, 공포를 외화하는 방식이며, 오랜 전통이었다. 더욱 심각하고 우려되는 것은 그 특징은 항구적이라는 점이다.
8일의 중의원선거에서 압승한 자민당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9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2월 10일
맺으면서
오늘날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일본 정객들의 역사 부정과 호전적 언사는 단순한 외교적 무례가 아니다. 한일, 한중 관계사의 바탕에는, 대표적으로 간도참변과 난징대학살에서 보인 잔혹성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런 일본은 종종 마치 피해자였던 것처럼 처신한다. 세계가 일본을 경계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하다. 일본 정부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트럼프가 ‘아메리카 퍼스트’를 천명함으로써 21세기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었다. 중국은 ‘중화’의 세상을 위하여 미국에 도전하고 있으며,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온갖 술수를 다 구사한다. 일본은 미-중-러 G3의 세상을 G4로 바꾸려고 이웃과 세상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력
-GDP:미국, 중국, 독일에 이어 세계 4위
-國富:3위
-대외 순자산: 1위
-증시규모:3위
-외환보유:2위
-비서양권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OECD 가입국이며 G7 회원국
일본재무장은 일본 우익의 염원이다. 이는 이제까지 미국의 중국 견제 목적에 부합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완승 기자회견‘에서, “헌법개정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그가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현대 일본의 중요한 정책에 관한 대전환‘을 실행하겠다는 말이다. 최종 목표는 단순명쾌하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우고, 자위대를 전쟁할 수 있는 군사조직으로 변경하는 것이다. 세계 3위의 경제력은 세계 3위의 전투력으로 전환가능한 무력과 같다. 일본이 플루토늄 10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정설이다. 당장 1250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머지않아 핵보유국이 된다. 우리가 어찌 일본의 재무장과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갈릴리교회 -한운석(며칠 뒤면 명동성당에서의 민주구국선언 사건 50주년입니다. 갈리리교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사건인데 제가 2년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위탁을 받아 작성한 원고를 올립니다)
갈릴리교회
1975년 5월 정부의 종용에 의해 해고된 기독자해직교수들 중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이문영, 그리고 후에 재임용에서 탈락한 이우정과 구약성서번역 작업
을 하던 문익환이 가세하여 갈릴리교회를 창립하였다(1975년 8월). 갈릴리교회
는 민중신학과 3·1민주구국선언사건의 산실이 되었다. 그것은 WCC와 독일교
회 등 세계 에큐메니칼 진영에 한국의 고백교회로 인식되었다.
창립배경
유신체제 선포 이후 기독교계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를 막으려는 정부
는 1974년에 일련의 긴급조치들을 통해 점점 더 강경하게 민주화운동을 탄압
하였다. 정부는 1975년 5월 중순부터 체제비판적인 교수들을 해고시키도록 소
속대학에 강한 압박을 가하였다. 특히 인권운동에서 부각된 한국기독자교수협
의회에 소속한 교수들이 많이 해고되었다. 한신대에서는 문동환과 안병무가 해
임되었고, 연세대에서는 서남동과 이계준, 고려대에서는 이문영이 의원면직,
김용준이 정직당하고 서울대의 한완상이 각서 제출을 요구받았다. 이들 중 문
동환과 안병무, 서남동, 이문영, 그리고 성서번역 때문에 휴직 중이던 문익환,
문동환과 새벽의 집이라는 공동체 생활을 함께 하던 이우정은 해직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진보적인 신학을 펼칠 수 있는 새로
운 교회를 만들자는 데 뜻을 함께 했다. 여기에 문익환이 처음부터 함께 했다.
그들은 1933년 이후 독일 대학으로부터 추방당한 K.L.슈미트, K.바르트, F.슐
츠를 생각했으며 바르멘 선언과 고백교회를 기억하였다.
남서독선교부(EMS)로부터 1975년 3월 기독교장로회(기장, PROK)에 선교동역
자로 파견된 도로테아 슈바이처는 일찍부터 갈릴리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슈
바이처의 한국활동 첫 번째 보고서(Rundbrief 1)는 1975년 11월 중순에 쓰여
졌는데 그 중심내용이 ‘갈릴리교회’와 서남독 선교부(EMS)의 파트너교회인
기독교장로회의 사회참여적인 비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었다. 슈바이처는 이
해직교수들의 교회를 갈릴리교회라 이름지은 유래를 설명하는 안병무의 설교
를 말미에서 길게 인용한다. 안병무는 갈릴리를 예루살렘에 대한 대조로서 인
식했다. 예수의 선교지역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차별받는 갈릴리였다. 거기서 그
는 제자들을 선택했고 평범한 민중인 ‘오클로스’를 자기 주위에 모이게 했다.
그는 경멸당하는 자들, 고통받는 자들, 사회와 종교적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자
들에게 전적으로 헌신하였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예수는 그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거기서 부활했으며 자기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다시 만났다. 그래서 갈릴리교회라는 이름은 ‘예루살렘’을 떠나 ‘세상을
위한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앙고백을 표현한 것이다.
설립과정
그들은 교회설립 예배를 1975년 8월 17일 흥사단 소유의 대성빌딩에서 열었
다. 여기에는 기독자해직교수와 그 가족, 정치적인 이유로 수감된 사람들의 가
족, 자유언론수호 투쟁 중 해고된 기자 등 33명이 참석하였다. 기관원 9명도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다. 건강이 안좋은 이해영이 당회장직을 맡아 주었는데
이듬해 3월에 그가 소천한 이후에는 구성원들이 2개월씩 돌아가면서 당회장직
을 맡았다. 정부의 압력으로 8월 24일 대성빌딩에 들어갈 수 없었던 갈릴리교
인들은 명동 한일관에서 예배를 드렸다. 문동환은 그날 오후 한빛교회를 찾아
가 이해동 목사에게 갈릴리교회가 모일 수 있게 장소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
다. 이해동 목사는 기꺼이 수락하였다. 이런 곡절을 거쳐 갈릴리교회는 8월 31
일부터 한빛교회에서 2시 30분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국은 한
빛교회를 감시의 대상으로 삼아 한빛교회로 통하는 골목 어귀에 많은 기관원
들을 투입하여 자나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신분을 확인하는 등 살벌한 분위
기를 조성했다. 교회 근처의 건물에서 기관원이 교회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사
진을 찍어댔다.
단체 활동
예배:
갈릴리교회는 이우정,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6인이 설교와
사회를 돌아가며 맡았으며, 각계의 덕망 있는 인사들이 설교자로 초청되기도
했다. 기존의 예배문화와는 차별되었다. 의자를 둥글게 놓고, 설교자도 강단에
서 내려와 말씀을 전했으며, 설교가 때로는 대화의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이해동은 한빛교회 담임목사이면서 갈릴리교회 총무 겸 사찰 역할을 담당했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 갈릴리교회 예배에는 20~30명의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주
요 참석자는 기독자 해직교수들과 구속자 부인들이었으며 초기에는 해직기자
들도 참여하였다. 이해동은 동아투위 멤버들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동아투
위 2대 위원장이던 안종필 부부와 박종만/윤수경 부부가 갈릴리교회에 나오다
한빛교회 등록교인이 되었다. 갈릴리교회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게 열려 있었다. 집을 강제 철거당하고 쫓겨난 빈민들, 억울하게 해고된 노동
자들이 수시로 참석하였고 많은 구속자들이 참여했었다. 설교 앞에는 고난의
현장들에 대한 고발과 보고의 순서가 있었으며, 현실을 위한 기도의 순서가 있어서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들의 수난을 함께 나누고 연대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
친교시간은 수감자들의 근황과 새로운 수감자나 출옥자에 대한 소식 등을
나눔으로써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는 시간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과부의 기도’라는 설교에서 “기도란 하나님을 믿고 이렇듯 끈질기게
몸으로 현실과 대결하는 일이라고 예수는 이 본문(누가 18장 1-8절)에서 우리
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불의한 재판관의 입에서 정의가 선포되게 하
는 힘이지요”라고 기도의 힘을 강조하였다.
3·1민주구국선언사건 이후의 변화
갈릴리교회가 시작한지 8개월만에 명동성당의 삼일절기념미사에 이은 신구교
합동기도회에서 문익환이 기초한 민주구국선언문이 이우정에 의해 낭독되었다.
박정희가 최대의 정적으로 생각했던 김대중이 재야인사들과 함께 한 거사였기
에 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고 유신정권의 최대위기를 가져온 사건이었
다. 문익환이 작성한 초안을 갖고 2월 19일 안병무의 집에서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이 함께 향후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모두 갈릴리교회의 설
교자들이었다.
삼일절 거사 이후 이우정을 제외한 갈릴리교회 설교자가 모두 구속되자 문익
환의 아내인 박용길과 이해동의 아내인 이종옥을 비롯한 여성들이 갈릴리교회
를 이끌어갔다. 두 사람은 사찰 일뿐만 아니라 설교자 섭외, 예배진행, 기도,
말씀을 읽는 일까지 맡아서 했다. 한동안은 설교가 없이 구속자들의 부인과 어
머니들이 모여 서로 근황을 나누고 찬송과 기도로 예배를 대신하기도 했다. 후
에는 윤반웅 목사와 김선주, 유운필, 전학석 목사와(이상 기장 목사들), 이두수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등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해주었다. 주보는 주로 박용
길이 직접 손글씨로 써서 만들었다. 문익환이 출옥한 후에는 부부가 번갈아가
며 정성스럽게 주보를 만들었다.
1983년부터는 문익환이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가 수감되었을 때는 정철린, 문
재린, 박형규, 이해동 목사 등이 돌아가며 설교를 했다. 갈릴리교회를 80년대
에 실질적으로 책임진 것은 박용길 장로였다. 유원규 목사가 한빛교회에 부임
한 1984년 이후로는 그가 설교도 하고 주보도 만드는 등 큰 도움을 주었다.
갈릴리교회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 관련자 가족들도 품
어주었다. 그 마지막 구속자였던 김남주 시인이 1988년 12월 석방되자 갈릴리
교회는 1990년 4월 1일 예배를 끝으로 모임을 중단하였다.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갈릴리교회가 유명해지자 수감중인 학생들이나 노동
자들의 가족들이 갈릴리교회에 와서 서로 사정을 이야기하고 같이 기도하며
위로를 얻었다. 1983년 4월 3일의 주보는 ‘양심수들을 위한 양심수 가족들의
모임. 갈릴리교회“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이해동 목사가 주축이 되어 1974
년 7월에 시작한 목요기도회는 이해동 목사가 구속되면서 모임장소를 한빛교
회로 옮겨왔다. 그뒤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될 때까지 매
주 목요일 10시에 한빛교회에서 ’구속된 동지들과 함께 드리는 정의·자유 구현
정기목요기도회‘가 개최되었다. 한빛교회는 이렇게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대표
적인 장소가 되었다. 시국사건으로 구속됐던 학생이나 민주인사가 석방되면 그
들을 환영하는 예배가 한빛교회에서 개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1
민주구국선언사건 이후 갈릴리교회가 세계교회들에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갈
릴리교회는 WCC나 해외 교회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꼭 들려야 할 순례코
스로 인식되었다.
결과/영향
기독자해직교수들이 기존의 교회틀에 얽매이지 않고 민중해방을 위한 성찰의
장을 열어가고자 했던 갈릴리교회에서 민중적 수난의 생생한 증언들을 바탕으
로 서남동의 ’한恨의 신학‘과 안병무의 ’사건의 신학‘ 그리고 문동환의 ’기쁨의
신학‘이 어우러져 한국의 독창적인 ’민중신학‘이 태동하였다. 3·1민주구국선언
사건 이후 신학자들의 감옥 체험은 민중신학을 더욱 다듬는 계기를 제공했다.
갈릴리교회 교인들의 유신체제와 신군부의 독재체제에 대한 용기있는 저항은
독일교회에 나치에 항거했던 고백교회를 연상시켜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재정적 및 정신적 지원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1980년 5월17일 담임목사
인 이해동이 구속된 한빛교회는 EMS의 도움으로 오랜 숙원이었던 교육관을
교회 근처에 새로 마련하였으며 그후 갈릴리교회는 여기서 예배를 드렸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 이후 갈릴리교회 설교자들의 부인들과 이희호 여
사는 구속자의 석방과 민주화운동을 창의적으로 벌이면서 1987년 민중항쟁까
지 지속되는 효율적인 여성투쟁공동체를 발전시켰고 여기에 슈바이처가 가세
하여 외신기자들과의 소통을 담당하고 독일교회 및 WCC에 한국의 인권침해
현황을 알리고 지원을 이끌어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정된 공연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동작구지부 제13기 출범식 및 대의원대회
-일시: 3월 3일 화요일 · 오후 5시 – 6시
-동작구청 4층
최근 공연
2026년 한국민예총 후원의 밤 https://youtu.be/bleqdSzOE9Q
- 일시 : 2026.2.4.(수) 오후6시-8시
- 장소 : 공간하제 (서울시 중구 필동로1길 10-6 하제의숲 B1)
○ 프로그램 :
#돌덩이
#착한전쟁은없다
문익환 목사 추모제: 1월 17일 https://youtu.be/BqH3ILpgjWw?si=68Sr_AL7On0_DrxR
+ 장소: 마석 모란 공원
+ 행사: 11시
<공연곡>
1. 내 나라 내 겨레(1절만)- 낭송: 주광술, 이영숙
2. 다시 만난 세계- 낭송: 강신만
3. 착한 전쟁은 없다, 아침이슬(모두 다함께 부르는 노래, 봄날은 4부)
2026년 1월 10일 박종철39주기 추모제 https://youtu.be/3ivrFMGcQDo?si=sO4x4qFaLhZBAAa2
+ 장소: 남영역 인근 민주화운동기념관(남영 대공분실) 교육관
<공연곡>
<부치지 않은 편지>,<다시 만난 세계>,< 그날이 오면>
언론보도
[1] “노래로 어려운 순간 넘어설 수 있는 힘 얻었으면”… 종합예술단 '봄날'
https://kgnews.co.kr/mobile/article_comment.html?no=805804
[2] 종합예술단 '봄날', 독일에서 평화 노래
https://www.kgnews.co.kr/news/article.html?no=801093
[3] 현모양처에서 '투사'가 된 여인, 이젠 노래를 부릅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71220
[4] '봄날' 베를린 소녀상 철거반대 활동 -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http://gkjournal.org/30/?idx=39062933&bmode=view
[5] 종합예술단 <봄날> 베를린 순회 공연에서 소녀상 철거 반대
http://www.pressarirang.org/2577
[7] (296호 작은 목소리) 종합예술단 봄날이 여는 행복한 합창의 ...
https://www.ssialsori.org/66/?bmode=view&idx=166940835
[8] 이름 없는 독립군의 노래, 합창극 '아무개의 나라'로 되살아난다
https://www.kgnews.co.kr/news/article.html?no=838405
[9] 항일 투쟁 합창극 '아무개의 나라' 5일 공연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15889
일정